옥과교 50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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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3     두줄시란 무엇인가 ... 서비 2013-03-06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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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줄시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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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수



시의 행수를 가지고 시의 형태를 가름한다는 것은 오늘 한국시에서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행의 자수제한이나 운율, 외형률이 거의 사라져버린
말 그대로 자유시 형식이 보편화된 지경에서 단지 시행이 두줄이라는 것만으로 두줄시라고 명명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만일 두줄시라는 시형식이 존재하려면 단순히 시행이 두줄이라는 것만으로서가 아니라 두줄로서 완성된 시작품의 형태를 띠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시형태가 보편화된 양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두줄이라고 해서 아무런 제한없이 두줄로 쓰면 두줄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영미시에서는 아직도 14행의 소네트도 있고, 일반시에도 두운, 각운 등이 살아 있어 우리가 쓰는 자유시 개념과는 조금 다른 대목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자유시가 리듬감이 없는, 즉 외재율이나 내재율이 전혀 없이 막 써내려간 형식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외재율,내재올, 율조가 있는 듯 없는 듯 시행에 스며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소월의 시가 보여주는 율조, 김영랑의 깔끔한 사행시도 있다.
그렇긴 하나 예전에 비해오늘의 자유시에서 율조가 많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다.
자수와 율조를 엄격히 지켜야 했던 전통의 시조가 사실상 사라져가버리다피 한 것은 자유시의 침범을 방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두줄시인가.

두줄시는 이미 자수와 율조가 무너져버린 이후 시가 필요없이 길어지고 난삽해져가는 오늘의 자유시에 대한 반성으로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두줄시는 단 두행으로 존재해야 한다.

단 두줄로서 이미지, 상징, 의미가 분명한 시형식으로 존재한다.
두줄시의 등장은 우리 문학사에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문학론자들 중에는 시는 짧아야 한다는 논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의 특성을 압축해서 하는 말이다.
시는 노래이며, 시는 절창이라는 뜻에서 하는 말로 생각된다.
두줄시는 '더 짧아야 한다'는 쪽에 서있는 시형식이다.

더 짧은 형식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것은 촌철살인의 절규이며, 이미지, 상징 자체이며 빛과 그림자 자체인 시형식이다.
때문에 두줄시는 골계,해학,풍자는 물론이려니와 잠언, 경구를 담을 수도 있고,
자유시의 발화점인 최초의 불꽃, 법어까지도 담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측량할 길이 없는 언어를 넘어선 침묵까지도 담을 수 있는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두줄시가 현대 자유시에 대한 반성의 한 형식으로 등장했지만 아직 그 문학양식이 우리 문학에 자리매김된 상태가 아니므로 주변부에 서성거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두줄시의 운명은 얼마나 훌륭한 두줄시 작품이 생산되어 문학대중의 호응을 얻느냐에 그 생명력이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잘 쓰여진 두줄시는 지뢰와 같다.
건드리면 화약냄새를 뿜어내며 폭발한다.
두줄시의 행간 속에 전차를 날려버릴만한 폭발력이 잠재되어 있다.
그리 만만한 시형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두줄시는 흡사 번개와 천둥에 비유할 수 있다.
번개가 치고 잠시후 우르르꽝꽝 천둥이 하늘을 흔든다.
번개는 두줄시의 첫행이요, 천둥은 그 첫행을 잇는 둘째행이다.
번개와 천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후 대개는 장대 같은 비가 퍼부어댄다.
말하자면 (독자의) 감동이 뒤따르는 것이다.

세상만물에는 어느 것에나 두줄시가 숨어 있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이 될지 모르나 어쨌든 천지창조 설화를 보면 두줄시로 시작됨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저녁이 오고 아침이 왔다, 궁륭과 땅으로 갈라졌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나왔다,
이러한 진술의 배경을 깊이 생각해보면 두줄시로 못담을 세상 느낌이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해가 낮을 데리고 지나가면 달이 밤을 데리고 온다.
빛이 있는 그늘이 있다.
모든 세상의 시스템이 둘로 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어쩌면 이런 자연법의 이치가 두줄시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한마디로 두줄시에 못담을 시사상이 없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두줄시는 아직 태동단계라고 할 수 있다.
두줄시인들이 훌륭한 두줄시를 많이 생산하여 당당한 시형식으로 자리잡기까지에는 시간과 시적 역량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두줄시는 그 시작이 미미하나 성서의 말대로 그 결과는 장대해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난 1년여 동안 두줄시 사이트에는 수천 편의 두줄시가 올라온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자유시 방도 있었으나 두줄시 방이 생기고부터는 자유시 방은 한산하고 두줄시 방이 부산했다.
이것은 다른 분석도 가능하겠지만 그만큼 두줄시가 새로운 시형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으며 문학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조짐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듯하다.

여기, 이땅에 처음으로 두줄시집을 펴내는 것은 두줄시의 출생을 선포하고,
두줄시의 존재를 공식화함으로서 문학대중의 비판과 격려, 그리고 전파를 목표로 삼고자 함에 있다.

작은 도시국가 로마가 마침내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 되어 세계역사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한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본다.

언문으로 취급되어 아녀자나 쓰던 한글이 한문을 몰아내고 마침내 국어로 발돋움한 과정을 우리는 겪은 바 있다.
두줄시가 한국문학의 당당한 문학양식으로 자리잡아 십만, 백만명의 두줄시인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

그리하여 두줄시가 이땅의 주된 시형식으로 자리잡아
'시가 넘치는 사회'를 열어 '시인공화국'이 들어서게 되기를 희망한다.




- 산

오늘은 꼬악 한 번 안아줄 게요
땅 것 날 것 품 주느라 마실 한 번 못간 당신



- 悲 日

삶과 죽음 사이를 비춰보려
얼음의 마음을 초 삼아 성냥을 긋다



- 향수

등에 업고 멀어진 고향
보따리 보따리 곰삭은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 靜 寂

새벽 한 시 산사에 꽃 떨어지는 소리
아랫목 뒹굴다 하품하는 새끼고양이



- 두줄시

두 줄이라는 제약이 나를 거의 질식하게 한다
뭔가 여기에 또다른 시맛의 비밀이 숨겨있을 것도 같은데



- 그리움

그리움은 죄가 아니라
벌이다



- 울어메

자식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만 좋았습니다
누룽지만 긁어도 배부르던 울어메



- 片雲

우두커니 하늘 보니 무심히 내가 간다
어디를 떠돌다가 한 조각 구름 됐나



.......... 가끔 마음이 가는 간단한 문구(?)들을 보다 .. 아! 이것이 두줄시구나 하여 .. 찾아 정리해봅니다. (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