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
100년도 안되는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은 세 번을 죽다 살아났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민족 자체가 자칫 인류 역사에서 잊혀버릴 수도 있었던 위기였다.
한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그럭저럭 위기를 수습해왔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참담했던 과거를 잊어버렸다.
아니 오히려 스스로를 ‘역경을 이겨낸 위대한 민족’ ‘하면 되는 민족’으로 위안하며 대견스러워 했다.
그러나 50년이 멀다 하고 되풀이되는 이 역사적 사건들이 그저 우연한 것이었을까.
언제나 새로운 각오로 출발만 하면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일까.
이런 위기의 연속에서 우리들 내부에 숨어 있는 어떤 필연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 나는 마흔을 넘어섰다.
마흔을 유혹에 흔들리지 않을 나이라고 해서 불혹이라 부르다던가.
그런데 나는 마흔이 되면서 더욱 흔들리기 시작했다.
산다는 건 뭘까 역사란 뭘까 그리고 국가란 개인에게 무엇일까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도대체 뭔가
나는 새로운 답을 찾고 싶었다.
그리고 그 답을 공자의 유교에서 찾아냈다.
유교 사회 속에서 성장했고 그것을 공부했던, 그래서 한때는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생각했던 나에게 찾아낸 이 답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건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작은 희망이기도 했다.
한일합방을 부른 무기력한 정부와 위선적 지식인들. 6.25를 부른 우리 문화 속의 분열 본질, 그리고 IMF를 부르고만 자기 기만과 허세, 그것들은 도덕의 가면을 쓴 유교 문화 속의 원질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었다.
위선, 분열 본질, 자기 기만과 허세, 그것들은 바로 우리 사회가 그토록 즐겨 부르짖던 도덕적 가치, 단일 혈통의 우월성, 그리고 무거운 권위들의 벌거벗은 뒷모습이었다.
단지 그것들이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있었고 정치적, 사회적 권위에 의해 보호되어 왔기에 쉽사리 알아채거나 지적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러한 요소들은 오늘도 어렵지 않게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내부에서는 크고 작은 한일합방 류의 협잡과 6.25식의 동족 죽이기와 분열, 그리고 허세와 자기 기만으로 인한 IMF형 파산이 연속되고 있다.
사건이 달라 보이고, 크기와 규모와 영역이 달라 별개의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우리 문화의 심층에 자리잡고 있는 하나의 원인 때문에 지속되는 것들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내면을 한꺼풀만 젖히고 들여다보면 언제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시커먼 곰팡이, 바로 유교라는 곰팡이 때문이다.
장이 나쁘면 얼굴에 시도 때도 없이 여드름이 돋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화장을 해도 소용이 없다.
유교는 처음부터 거짓을 안고 출발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지만 유교의 씨앗은 쿠데타로 왕권을 쟁탈한 조갑이라는 한 중국인 사내의 정치적 탐욕을 감추려는 목적 아래 뿌려진 것이었다.
기원전 1300년경 황화 유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현장을 우리는 고대 동양 문화의 실록인 갑골문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 후 이 정치적 사건은 교묘하게 도덕적으로 위장되어 전해오다가 공자라는 한 사나이에 의해 후대에 전해졌다.
물론 그 당시 공자는 사건의 내면에 숨겨진 불순한 문화적 코드를 읽어내지 못한 채 도덕만을 외쳐댔다.
그 결과 현란한 수식어에도 불구하고, 공자의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도덕이었고, 남성을 위한 도덕이었고, 어른을 위한 도덕이었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고, 심지어 주검을 위한 도덕이었다.
때문에 공자의 도덕을 딛고 선 유교 문화는 정치적 기만과 위선, 남성적 우월 젊음과 창의성의 말살 그리고 주검 숭배가 낳은 우울함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이방인의 문화는 조선 왕실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신분사회, 토론 부재를 낳은 가부장 의식, 위선을 부추기는 군자의 논리, 끼리끼리의 협잡을 부르는 혈연적 폐쇄성과 그로 인한 분열 본질, 여성 차별을 부른 남성 우월 의식, 스승의 권위 강조로 인한 창의성 말살 교육 따위의 문제점들을 오늘날까지 지속시키고 있다.
이것들은 오늘날 우리들 삶의 공간에 필요한 투명성과 평등, 번득이는 창의력, 맑은 생명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것들이다.
유교의 유효 기간은 이제 끝난 것이다.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공자의 도덕은 힘 있는 자와 돈 가진 자를 위해 봉사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수시로 우리 눈앞에서 휘두르는 도덕성 회복이나 민본주의 사상 등의 유교적 깃발들은 그 자체가 이미 새로운 가부장적 독재와 밀실 야합, 그리고 불평등의 가치를 옹호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
조선 왕조의 긴 역사와 중국 왕조들의 반복된 실패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우스광스런 모습들은 바로 공자의 유교 문화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구조적 위선자들이 만든 필연적 졸작들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오늘도 이 시대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며 목청을 돋우는 이 땅의 위선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을 보면서 현기증을 느낀다.
차라리 이젠 그만 한국호에서 내리고 싶은 심정이다.
맑고 순수한 사람이었던 우리, 패기와 자신감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던 우리는 유린되고 세뇌되며 유교적 한국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공자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공자가 제시하는 도덕 속에서 우리들 대부분이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조적 위선자로 변해 가고, 우리들의 삶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유교문화의 이러한 해악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 역사 속에서 겪은 고난들을 우연으로 치부하거나, 몇몇 개인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고, 또 지정학적 근거를 통해 어설픈 남의 탓 지적이 지속된다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가슴 답답함의 실체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건들은 계속될 것이다.
하루만 지나면 엉클어지는 줄서기나 신호위반 단속, 그리고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전진대회의 구호 속에서 답을 찾는 한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 위선의 색깔은 점점 더 진해져 갈 것이다.
결국, 문화적 토양이 바뀌고 생각의 틀이 바뀌지 않는 한 어떠한 노력도 구호도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를 담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유교를 버리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이미 100여 년 전 시작된 혁명들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사람 잡아먹는 유교를 버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중국은 이제 새로운 길을 향해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기고 있다.
조금 덜그럭대긴 해도 방향은 제대로 잡은 셈이다.
역시 100여 년 전, 일본은 유교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날선 칼로 공자를 베어버렸고 메이지유신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새로운 틀을 마련했다. 그들 역시 적지 않은 고통을 감내했다.
나는 우리 민족이 그 동안 시련을 겪을 만큼 겪었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의 아픈 교훈은 필요가 없다.
이제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삶을 옥죄어온 도덕의 그 더러운 변질 과정을 파헤쳐 드러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신봉했던 역사와 문화들이 우리들의 삶을 얼마나 망가뜨려 놓았는지에 대해 알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곡된 권위와 도덕적 가치들 뒤에 숨겨진 정치적 협잡과 역사적 속임수를 끄집어 내놓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100여 년이 늦은 오늘, 더구나 21세기의 문턱에 서서 이런 글을 쓰는 자체가 무척 쑥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제는 유교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할 시점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이제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모든 껍질을 벗고 자신의 모습에 솔직해질 때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독자들이 정말 한 번쯤 허심탄회해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좀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우리들의 삶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으면 한다.
이제까지처럼 허풍으로 가득 찬 아. 아. 대한민국이 아닌, 유교적 허세문화와 정치적 허세에서 벗어난 맑은 삶의 옷을 말이다.
이제 지도는 찢어졌다.
꼭 21세기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이제 새로운 삶의 시대에 도달해 있다.
이른바 4I로 대표되는 산업(industry), 투자(investment), 개인(individual), 정보(information)로 구성된 새로운 삶의 연합체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 4I는 국경 위를 제약 없이 넘나들고 있다.
이제 서로에게 이익만 된다면 우리들이 어떤 국적을 가졌건 어디서든지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더구나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말의 파괴력은 몇몇 미래학자들의 경고 수준을 넘어섰다.
이제 그 영향력은 내가 사는 24평 국민주택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버렸다.
유태인 출신의 세계적 투기꾼 조지 소로스는 이 새로운 시대를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최근 저서에서 ‘열린 사회’로 불렀다.
공감되는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잡자마자 하룻밤 새 다 읽어버렸다. 역시 세계적인 꾼은 뭔가 다른 법이다. 그 역시 국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남보다 일찍 들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위대한 장사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사농공상에 깊이 세뇌되어 있는 한국인들은 교수나 학자의 말에는 제법 귀를 기울이지만 장사꾼의 말은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경제가 모든 가치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고 금융 상식은 비타민 C만큼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렸다.
나는 신토불이가 싫다.
방송이고 뉴스고 심심하면 써먹는 ‘애국적 발언’이 신토불이다.
그러나 사실 몸과 흙은 둘이 아니라는 이 말 뒤에는 박정희 시대의 국산품 애용이 있고, 다른 한 구석에는 일제시대의 물산장려운동이 있다.
그리고 아주 멀리는 전국시대의 철학자 노자가 숨어 있다. 어쩐지 도피의 냄새가 난다.
노자는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했다.
‘스스로 이런 형태’임을 뜻하는 자연이란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자연계 내의 모든 존재는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봄이 오면 봄처럼, 여름이 오면 여름처럼, 가을이면 가을처럼, 겨울이면 겨울처럼 말이다.
황사가 날면 세수를 멈추고, 더위가 오면 에어컨을 끄고, 가을이 와도 로션을 바르지 말고, 겨울이 오면 짚풀더미를 뒤집어쓰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열매가 있으면 열매 먹고, 고기 잡으면 고기 먹고, 없으면 굶고, 수염 나면 기르고, 울고 싶으면 울면서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라고 외친 사람이 바로 노자다.
자연의 흐름을 어기고 옷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고, 핸드폰도 만들고, 제도도 만들고, 학교도 만든 인간들 때문에 자연의 질서는 훼손되고, 결국에는 자신들이 편리하다고 생각했던 문명의 이기들 때문에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자연으로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나와 있다.
그저 일주일에 한두 번 산에 오르는 정도로 노자의 잔소리에 부응하는 수밖에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고 쌀 시장, 쇠고기 시장이 열리면서 우리 먹거리가 설 땅은 점점 좁아졌다.
이때 터져나온 것이 바로 신토불이였다.
‘뭔 소리여. 우리 몸은 우리 땅에서 난 것을 먹어야 혀’
수입 개방이 못내 찜찜했던 농부들과 우리 사회는 이 기막힌 논리에 무릎을 쳤다.
‘그렇지. 우리 몸은 우리 땅에서 난 것을 먹어야 해’
그럼 질문을 하나 해보자
‘왜 신토불이지’
‘우리 땅에서 우리 몸이 났으니, 우리 땅의 소산을 먹어야지’
‘그럼 뭐가 좋은데’
'건강해지지‘
‘정말인가’
‘그럴걸 아마’
우리 땅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그건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어진 공간일까 아니면 민족적 경계선 아마도 민족적 경계선일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 먹거리도 우리 것이라고 열심히 먹는 것을 보면, 그럼 일제 농산품은 안 될까?
옛날부터 우리 문화를 받아들였고, 우리 조상들이 많이 이주해간 곳인데.
그래도 그건 안 되지 싶다. 감정 때문에.
그런데 왜 중국 것은 안 될까. 시장에서 중국것만 나타나면 독약 보듯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TV, 리포터들은 중국산 도라지만 보면 정색을 할까.
'이 놈이 바로 중국산 고사립니다. 색깔이 시커멓고, 요 놈이 바로 우리 고사립니다. 보기만 해도 맛깔나게 생겼지요.‘
중국의 동북 지역은 옛 고구려 땅이고 발해의 영토라고 틈만 나면 문화적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도 왜 그곳에서 난 먹거리는 우리 것이 아닐까.
호박같이 둥근 가지, 주먹만한 고추, 뻘건 무, 그것들은 바로 우리 독립군들도 즐겨 먹던 민족의 먹거리들이었는데,
한국의 배가 세계로 수출되는 것은 우리 농업의 개가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오렌지는 언제나 농약이 많고, 그거 먹으면 양놈들처럼 눈알이 시퍼래질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수출은 국가 경쟁력을 위해 당연한 것이지만 수입은 신토불이 조항 때문에 언제나 조심스럽다.
한국에서는 법보다 무서운 게 어제나 이런 분위기다.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남들은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 가지 일을 놓고도 이렇듯 수시로 기준이 바뀌고 논리가 바뀌니 남들이 한국인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아닌가?
왜 그렇게 속이느냐고 항의하는 것 아닌가?
따지고 보면 솔직히 '우리 것‘은 거의 없다.
벼며 과일이며 채소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들여온 씨앗들이다. 토종들은 모양도 작고, 수확도 적어 일찌감치 외래종으로 바뀐 지 오래다.
즐겨 먹는 삼겹살의 주인공들이 우리 돼지인가? 모두 남의 나라의 허연 돼지들이다.
돼지 농장에 가보자. 첫날밤만을 기다리며 뒹굴고 있는 집채만한 종돈들은 모두 남의 나라 돼지다.
그 돼지들이 첫날밤을 지낸 곳이 한국이라고 그 새끼들이 모두 한국 돼지인가?
그러면 태국으로 신혼여행 갔다와서 난 이들은 모두 태국애들인가?
왜들 이러나, 눈을 잘 씻고 주변을 보자.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조금 차근히 보자. 그 어설픈 구호들에 속아넘어가지 말고 말이다.
‘우리 것’ ‘우리 것’ 하면 할수록 우리 모습은 작아진다. 그건 아무리 봐도 자신감이 없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우리끼리 하지 말고 남들과 경쟁해보고 ‘너희 것 좋아’란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일단 서울 한복판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미8군에게도 우리 농산품을 납품할 수 있어야 한다.
왜 그들은 과일 등 농산품을 ‘신토불이 한국산’이 아닌 일본이나 자기네 나라에서 날라다 먹는가?
그네들도 노자를 알고, 미국식 신토불이를 알아서일까?
캘리포니아 오렌지에 농약이 묻었다면 당당하게 항의해야 한다.
그리고 농약이면 농약, 세균이면 세균에 대해서만 말하면 된다.
그래야 방송국에 접수된 먹거리 관련 뉴스를 두고 고민을 하지 않게 된다.
혹시라도 이 뉴스 나가면 특정 업종 농어민은 모두 끝장이라는 논리로 보도를 보류하는 봐주기는 없어야 한다.
비뚤어진 기준으로 자꾸 봐주다보면 결국 손해는 우리가 보게 된다.
당장 신토불이를 너무 외치다보니 중국에선 농약을 듬뿍 쳐서 들여온 먹거리들이 우리 것으로 둔갑해 우리들 몸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중국에서 사용하는 농약들은 이미 선진국에서는 사용 금지된 것들도 많다.
또 설사 허가된 것이라도 유통 기한이 길기 때문에 약을 듬뿍듬뿍 치곤 한다.
오죽하면 최근에는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에 ‘청정 식품’이 다 등장했을까?
그런데도 내가 아는 중국인 교수님 한 분은 그것마저 조심스러워하신다.
‘그럴 어떻게 믿어’
하긴 공업용 알코올을 고량주라고 속여 팔아 설날에 마을 사람 여럿을 잡은 사람들이니 쉽사리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독한 농약에 절은 채 수입된 인삼이며 약초들을 우리것이랍시고 사다가 약탕기에 넣어 푹푹 고아 먹는 미련이 계속되고 있다.
신토불이만이 건강을 지켜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남의 땅에서 난 것이라도 깨끗하면 건강에 유익할 것이고, 우리 땅에서 난 것이라도 뭔가 장난을 쳤다면 건강에 나쁜 것이다.
제 철에 난 과일을 먹어야 한다는 논리도 그렇다.
그럼 비닐하우스는 다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지구를 빙빙 돌며 벌어 와도 시원치 않는데, 골방에 쭈그리고 앉아 못난 우리 것 지킬 생각만 하고 있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못난 짓이다.
우리 사회의 신토불이에는 일종의 기피증과 문화적 폐쇄성이 교묘하게 숨어 있다.
기피증이란 자기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싫어하거나 불안하게 느끼면 미리 도피해버리는 증세다.
그리고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핑계를 만들게 된다. 핑계대지 말자. 입장 바꿔 생각을 해보자.
한민족의 건강은 신토불이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민족의 미래는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열릴 것도 아니다.
못났으면 빨리 고치고, 좋으면 나가서 알리자. 뭐 그리 겁낼 일이 많은가.
술 한잔이 망친 나라
한국인들이 회식을 즐기는 이유는 공돈이 있기 때문이다.
조직 내에 공돈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함께 먹자’는 공범 심리가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각자 번 만큼 돈을 받고 돈을 쓰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 심리가 어느 조직에나 갈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련된 것이 판공비다.
일전에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장’을 맡아본 일이 있다.
그 조직은 나에게 판공비라는 별로 많지도 않은 비용을 책정해주었다.
나는 그 비용을 쓰지 않았다.
물론 일은 판공비가 없이도 가능했다. 밥은 내 돈 내고 먹으면 되고 차는 녹차 타서 마시면 그뿐이니까 말이다.
담당자는 판공비를 빨리 가져가라고 독촉을 했다.
장부 정리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끝까지 그 판공비를 사용하지 않았고, 그 돈의 행방은 모른다. 물어보지도 않았다.
한중일 3국 돌아보면, 공돈 쓰기 문화가 가장 심한 나라는 중국이다.
그 나라는 사회주의 국가다. 모든 돈의 관리를 국가와 조직이 맡아서 한다.
개인들은 봉급만을 받을 뿐 나머지 공적인 일의 처리는 모두 영수증만 내밀면 나라에서 다 지불한다.
그러니까 돈을 쓴 곳이 ‘공적인 곳’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증거’만 있으면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단순화시키긴 했지만 중국의 부패는 바로 이렇게 진행된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출세해야 산다’는 우리 한국인들이 벌이는 서바이벌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처방전이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키워드중의 하나다.
수단과 방법에 관계없이 자리에 올라서고 ‘도장’을 쥐게 된 자는 천하를 호령할 수 있다.
조선 왕조는 이제껏 많은 사람들에 의해 미화되어왔다.
거기에는 우리가 간과했던 이유가 있다.
조선 왕조가 멸망한 이후, 글을 다루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전통적인 한학자들이었다.
그들만이 글을 쓸 수 있었고, 학문을 점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역사와 사회 해석의 주체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학문적 사상적 고향을 미화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후 일본이 한반도를 통치하던 시기, 일본은 이른바 반식민사관을 동원해서 조선을 폄하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모든 역사적 해석들은 이른바 ‘반식민사관’의 깃발 아래 다시 한 번 왜곡되기 시작한다.
정당한 비평조차 일본적 시각과 비슷하면 ‘식민사관’의 누명을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 우리의 현실이 제대로 보이겠는가.
이제는 우리의 단점을 지적하시오. 고치겠소 하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일 수도 있다.
겉으로 욕하면서 속으로 일본 부속품 죄다 수입하는 눈 가리고 아옹하는 태도를 버리고 떳떳하게 배우고 비판받고 훗날을 기약해야 할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과학과 통신의 발달, 금융, 다국적 기업들의 빠른 행동들로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는 국력의 차이를 고려해볼 때, 때를 놓치면 그때는 정말 비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
특히 역사의 한쪽 끝은 열려 있고 언제든 역전승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말이다.
법치가 되지 않는 이유
동양 사회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문제점 중에서 한국사회에 만연한 채 발전을 더디게 하는 현상으로 나는 세 가지를 꼽고 싶다.
첫째, 법치가 되지 않는다.
둘째, 늘 과거에 묻혀 산다.
셋째, 주검을 숭배한다.
이 세 가지는 유고의 특징 세 가지를 뒤집어 놓은 형태에 불과하다.
전통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유교의 두드러진 특징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문의식,
둘째, 온고지신,
셋째, 조상 숭배
인문 의식. 전통 학자들은 이 인문 의식을 들어 동양적 인간 존중 사상의 뿌리로 해석하기도 한다.
서구의 신본주의적 사고에 반해 인간이 주인이 되는 유교 사상이야말로 가장 인간에 어울리는 사고며 철학이 아닌가 반문하면서.
그리고 여기서 파생하는 것이 바로 부모 자식간의 유대 관계와 효 사상이다.
‘나’는 부모를 통해 나왔으니 부모에 효도해야함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 효도 사상을 도용한 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충성 강요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국가에 충성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라는 것이 논리라면 논리다.
부모에 대한 효도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복종을 강요하는 사회, 이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 바로 법을 가진 사람 마음대로 법을 주무르는 인치 문화이다.
이 효도와 충성의 공간에 들어서는 것들이 이른바 힘을 가진 기관들과 나이 많은 사람들이다.
힘을 가진 기관들은 스스로를 국가로 자리매김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한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모로 자리매김하여 군림한다.
지금도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터져나오는 큰소리는 ‘넌 부모도 없어‘다.
국가와 부모를 혼돈하고 부모와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혼돈하는 이 사회. 서로 적용되어야 할 규범이 전혀 다른데 이것을 혼돈하는 사람들의 사회. 극장표 들고 김포에서 하와이 가는 비행기 태워달라며 지르는 아우성과 무엇이 다를까
다 아는 이야기지만 법은 영어로 law다.
또 규칙은 영어로 rule이다.
어설프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법치국가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국, 그들은 법을 이야기할 때 the rule of law 즉 법의 규칙을 묶어 이야기한다.
어는 나라나 법은 다 있다.
조선시대에도 위대한 법전 ‘경국대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법은 엿이었다. 늘이면 늘어났고 자르면 잘라졌다. 엿장수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법은 있었지만 rule이 없었던 거다.
어느 누구에게도 법이 똑같이 적용되는 규칙. 그 규칙이 조선에는 없었고 한국사회에도 없는 것이다.
법이란 글자를 통해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글자의 원형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풀이를 한다.
고대 사회에서 시비가 있을 경우, 두 당사자를 물가에 앉힌다.
그리고 검은 양을 두 사람 등뒤에 세운 뒤 아무나 들이받게 한다.
잠시 후 재판 결과가 나타난다.
등을 받쳐 물 위에 엎어진 사람이 바로 범인이다.
재판관인 무당은 황당하기 그지없을 이 범인을 자루에 넣어 물 속에 빠뜨린다. 法이란 글자에 氵가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오른쪽의 去는 검은 양의 모습과 주술을 지껄이는 상황이 변화한 모습으로 간다라는 의미의 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동양의 법은 바로 이런 해프닝의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 아직도 이 전설의 분위기가 완전히 가신 느낌은 아니다.
역시 핏줄뿐입니다요
우리 스스로 우리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써먹는 상투어 중의 하나가 바로 ‘단일 민족’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지켜온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보자 우리가 정말 한 핏줄일까 그것은 교묘한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무슨 김씨 무슨 파의 자손들 외에는 모두 인간도 아니라는 못난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우리가 남의 나라, 남의 문화를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코스모폴리탄적 가치인 세계화의 흐름에서 밀려나고 도태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 이제는 인류 문명의 범세계화의 담론이 평상적인 것이 된 지금, 민족주의는 쑥스러운 테마가 되어 버렸다.
하물며 민족주의보다 하층의 정서라고 볼 수 있는 혈통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핏줄 문화의 현주소는 우리를 더할 수 없이 부끄러운 사람들로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집에 한 권의 책이 날아들었다.
나의 조상은 누구인가란 부제가 달린 족보였다.
그 족보에 의하면 나는 왕손이었다.
신라시대 경주의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황금 궤짝에서 태어난 하늘이 내려준 아들이 나의 조상이란다.
조상도 모르고 살아가는 내 처지가 딱해보였는지 보내온 족보였다.
그래 좋다. 왕손이라고 치자. 그럼 그 대단한 황금 궤짝은 누가 가져다놓은 것인가 임자를 못 찾는다면 그 잘난 경주 김가의 조상은 사생아가 된다.
중국의 고대 언어와 문화를 연구하는 입장에서 볼 때, 한국 학계의 가장 큰 병폐의 하나는 지나친 문화적 콤플렉스다.
관련된 논문과 저서들 속에는 있어야 할 학문적 치열함과 담담한 분석보다는 민족의 우수성을 고취하고 싶은 비분강개가 몇몇 사료들을 근거로 자라나고 있다.
한 핏줄, 단일 민족론이 단지 중화사상에 대항하기 위한 반발이며, 일본 식민사관을 벗어나기 위한 탄력 때문에 중심에서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더 튕겨져나간 것이라면, 우리 역시 같은 함정에 빠진 모습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허세가 되고 만다. 역사적 허세는 더 큰 허세를 불러오게 마련이고, 허세의 연속은 결국 더 큰 좌절을 초래하고 만다.
중국과 한국, 일본에는 서구의 오리엔털리즘적 비판에서처럼 못난 모습을 허세로 커버해보려는 자격지심이 도사리고 있다.
이 자격지심은 중국과 일본에게서 겪은 900번 이상의 전쟁의 고통속에서 더욱 증폭되어 중국, 일본과 관련된 모든 역사는 우리가 세계 최초이며 일본에 건네준 것으로 해석하고 마는 못난 심성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물론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의 위치를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싶은 본능이 있다.
하지만 민족을 사수하려는 반발이 기조를 이루는 역사 해석은 이미 해석으로서의 자격을 잃고 있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이루어진 민족 정서 또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모두가 왕손인 나라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가 단일 민족이어서 어떻다는 것인가 또 아니면 어떤가 설사 단일 민족이었다 하더라도, 수많은 중국의 침입과 몽골의 긴 지배, 자기네 놀이터처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드나들던 왜구들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실크로드 서쪽에서나 볼 수 있는 서역인들의 특징인 곱슬머리, 흰 피부, 쌍꺼풀을 한 수많은 경주 김씨, 전주 이씨들, 여진족들의 특징일 수 있는 외꺼풀에 검은머리, 작은 어깨의 황씨, 박씨, 정씨들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왜인들의 특징인 검은 눈썹, 작은 입, 작달막한 키를 유달리 해변 도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는가.
고고학적 발굴을 토대로 보면, 기원전 4000~3000년경 동아시아에는 신석기 문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황허 서쪽 일대를 포함하는 앙소 문화, 산동 반도 일대를 포함하는 대문구 문화, 그리고 리야오닝 성 일대를 포함하는 홍산 문화 지역과 산동 일대의 대문구 문화 지역이다.
이들 지역 중에서 가장 북방에 있던 홍산 문화는 다시 하가점 하층문화로 불리는 청동기시대로 이어지는데,
사실은 이 문화가 오늘날 한반도로 ‘민족들’을 송출한 주요 뿌리가 된다.
하지만 이 일대에는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부족들이 있었고 이들의 근원에 대해서는 전혀 파악할 길이 없다.
그저 여기저기에서 파헤쳐진 발굴품들을 토대로 커다란 문화권의 줄긋기를 하는 것이 이른바 역사이고, 문화권 구분이기 때문이다.
이들 문화권이 우리 한반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지역 문화를 고조선과 연결시키고 부여, 고구려와 연결해 해석하고 추리하고 있는 것이다.
학문 연구를 너무 단순화시키고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단순한 상식이 수십 년의 연구를 뛰어넘을 수도 있는 것이 인문과학의 약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가설들을 근거로, 그 많던 부족들 중에 어느 부족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한반도에 들어왔는가를 헤아리며 내 조상, 네 조상, 내 핏줄, 네 핏줄 하는 일이 우스꽝스러워진다는 뜻이다.
문화 인류학자들의 정의를 빌지 않더라도 모든 국가는 본질적으로 혼혈 민족 국가다.
무조건 넓은 땅은 다 우리 것이었고, 핏줄은 오로지 한 줄기였다는 ‘기대’를 역사에 라면 수프처럼 뿌려넣는 한 국물은 탁할 수 밖에 없다.
제대로의 역사가 보일 리 없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우리 조상은 모두 왕손이고 양반이라는 한국인의 족보 자랑 정서 역시 어색한 콤플렉스의 발로임에 틀림없다.
누가 물었나. 또 바꾸어보면 우리나라에 있는 약 200개의 성씨는 바로 그만큼 갈래가 일정치 않은 집단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꼴이 된다.
더구나 그들 모두가 왕손이었음을 강조하면 할수록 말이다.
역사를 자기중심주의적 입장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에 익숙한 중국인들에 대해 독일계 중국학자 에버하르트는 이렇게 비웃은 일이 있다.
‘모든 시대의 중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중국 문화와 사회의 단일성을 주장해왔고, 외국의 학자들도 이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을 4,000여 년에 걸쳐 동일성을 유지해온 세계의 유일한 문명으로 보고 싶어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론 안에서 전통적인나라들과 좀 근대화된 나라들에서조차 전형적인 국수주의의 강한 요소와 어떤 경우 인종차별주의의 요소까지 인식할 수 있다.’
동북아 일대의 문화적 역사적 다원성을 인정할 수 있어야 우리는 동아시아 사회에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자유스러워질 수 있고,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먼 옛날 이 지역에 운신하던 수백 개의 부족들이 세운 문화는 모두 지역 문화였다.
그리고 이들 지역 문화들은 다양한 접촉과 충돌을 통해 섞이고 혼합되었다.
문화인류학적 자료들을 보아도 당시의 족외혼 풍습은 너무도 보편적인 것이었고, 정치적 이해를 위해 진행되는 여자들의 거래 또한 흔한 일이었다.
여기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대의 관심사인 동이족에 간한 것이다.
동이족은 지금의 산동 일대에 거주하면서 황하 유역의 중국 상족과 치열하게 세력 다툼을 한 종족이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갑골문과 청동기에 주로 남아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대단히 강력하고 뛰어난 민족이었다.
그런데 이들 동이족 역시 단일 종족은 아니었다.
크게는 아홉 개 종족, 적게는 수십 개의 종족이 기원전 2000년경 이전부터 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갑골문을 통해보면, 상족을 이은 은나라가 자신들의 동쪽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동인(東人)으로 부르면서 점차 동이(東夷)라는 ‘ㄴ탈락’의 유사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때문에 사실 딴 이야기지만 동이족의 ‘이“자만을 가지고 ’큰 활을 쏘는 민족‘ 운운하는 것은 다소 황당한 해석이 된다.
왜냐하면 그 글자는 동이족이 거의 사라져버린 한나라 때쯤 ’人‘자 대신 대타로 등장한 글자이기 때문이다.
찬호와 세리가 미국으로 간 까닭은?
한국에서 가장 신성불가침의 마력을 지닌 단어가 무엇일까 민족 혹은 민족주의라는 단어가 아닐까
민족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선이요. 우리에게 있어서 어쩌면 궁극의 목적이기까지 한 단어다.
사실 한국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들추어보면 민족이라는 말이 이처럼 신성불가침의 얼굴을 하게 된 까닭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는 IMF를 ‘자본종속’ 운운으로 해석하는 민족적 울분에서 그 뒤에 숨어 있는 허탈과 두려움, 그리고 부끄러움의 콤플렉스를 읽는다.
분노는 수치심과 연결된 감정이라던가?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미리 펄펄 뛰는 것이 분노라면, 우리의 민족주의적 구호가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들의 부끄러움도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민족주의, 그 속을 뒤집어보자.
우리 사회 저층에 깔려 있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정서가 오늘 이 사회에 공헌한 것은 무엇인가 척화비의 주인공 대원군이 승리했는가?
사대부들이 일제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았는가? 행방을 우리 손으로 만들었는가?
남북을 이어놓았는가? 전쟁을 막았는가?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는가? 투명하고 건강한 경제구조를 만들어놓았는가?
무엇 하나 바꾸어본 일도 없고 올바른 예측 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한 우리들이 여전히 우리 민족 만세를 외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귀 막고, 입 막고, 눈을 가린 채 ‘우리끼리 만세’를 부르면서 미래 사회를 운운해도 되는 것일까?
정말 우리들은 도도하게 변하며 흐르는 세계적 흐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바뀐 것이 무엇이 있는가?
정치인들은 선거 벽보에 붙어 그 앞을 오가는 우리들을 여전히 비웃고 있다.
그들의 개인적 성취감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주민등록증을 내보이고 화장지보다 조금 빳빳한 투표 용지를 받아 기표소로 들어가 한 표를 던지는 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인가?
선거 참가는 민주시민의 권리 행사라는 알량한 입발림보다는, 차라리 그게 바로 이 땅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방법, 바로 권력과 힘에 대한 복종과 예의라고 솔직히 고백이라도 해주기 바란다.
하지만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통속이 되어, 민족주의 속에 마련된 기득권과 권위의 달콤한 꿀을 나누어먹고 있다.
정치인들, 당연히 그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본질적으로 유전자가 왜곡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한 입에서 두 가지 말을 아무런 혀 물림 없이 내뱉을 수 있는 요괴 인간들이다.
기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진실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청국장처럼 냄새가 풀풀 나는 현장을 보면서도 아무런 감정 없이 채팅하듯 기사를 뱉어내는 고급 품펜들이다.
권력의 해바라기들이 되어 있는 편집 데스크의 심중을 충분히 헤아리면서 만들어낸 원고들을 기사랍시고 만들어낸다.
학자들을 믿지 말라.
그들은 거짓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가면이 없으면,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빙충이들이다. 그들이 노문에 써대고 강의실에서 뱉어내는 말들은 아무 곳에도 써먹을 수 없는 그들만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들은 언제나 끼리끼리 만나서 자리를 나누고, 적당히 등록금과 세금을 연구비나 학술보조비 따위로 나누어먹으며 히히덕거리지만 돌아서기가 무섭게 서로를 물고 뜯고 비방하는 저열한 인간들이다.
정치인, 기자, 학자들처럼 민족과 민주주의를 열심히 외치는 집단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찾아낸 우리들의 대안이 찬호와 세리, 그리고 릭 윤이지만 이것이 해답이 될까?
찬호의 스트라이크와 세리의 디 퍼팅, 릭 윤의 미소에 일희일비하면서 손에 땀을 쥐어야 비로소 한국인인가?
그것이 나의 삶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들의 개인적 선택에 대해 왜 우리가 ‘애국적’ 박수를 쳐주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이 사실은 돈 때문에 나간 것이 아니고 국위선양을 위해서라고 자위를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열등한 대리만족 때문일까?
21세기 미래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유목민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정보와 돈과 문화적 가치는 이제 한가하게 국경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뚫고 지구 어디로든지 치닫고 있다.
유목민들이 풀을 찾아 양떼를 몰았듯이 이제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담보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야 하고, 생명부지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그런 지금, 한가하게 그들을 향해 박수를 칠 시간이 어디 있는가?
정치적 우울과 경제적 실연을 달래기 위해 마련된 3s(sports. sex. screen)의 구호품을 받아 정식적 삶의 한끼를 때워야 할 정도로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들일까?
나는 나로 살고 싶다.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잇다.
우리들의 10대는 문화적 고아들이다.
한국이라는 문화적 공간속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한국 싫어’를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그렇다고 서구의 자식이 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들의 20대는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세대들이다.
시대를 예측하지 못했던 지식인들의 피난처인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세월을 죽인 결과는 졸업장과 동시에 수여된 실업 면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나이 제한에 걸려 입사 원서조차 쓰지 못하게 생겼다.
30대는 1회용 반창고다.
어설픈 지식을 다 써먹는 5년 후쯤이면 미국, 유럽, 일본에서 밀려들어온 실력자들에게 밀려날 신세들이다.
이미 이들은 물 좋은 카페에서 밀려나고 있다.
하지만 미련을 갖고 있다. 그래 봐야 후회의 시간이 조금 늦어질 뿐이다.
지금의 40대는 이미 용도 폐기를 언도받았다.
튈 만한 힘도 없고 감각도 없다.
그렇다고 권위도 없다.
이들의 곁에서 정력이 최고조에 달한 마누라와 한창 등록금과 용돈을 퍼주어야 할 아이들이 펄펄 뛰고 있다.
그 옆에는 엉거주춤한 50대가 있다.
어차피 이제 운명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임을 경험으로, 직감으로 알아버린 이들의 마음은 스산하기 그지없다.
눈치나 보면서 연명하는 것이 최고다.
이에 비해 나름의 퇴직금이라도 건진 60대는 노여워해볼 수도 잇다. ‘괘씸한 것들’ 하면서 차라리 행복한 분노다.
70대를 포함한 그 이상의 세대들은 가뜩이나 졸린 눈을 더욱 껌벅거린다.
‘도대체 어떻게 돼가고 잇는 거야?’ 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문화적 폐쇄성에 있었다.
그것이 우월의식에서 비롯되었건 자격지심에서 비롯 되었건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들 삶을 망가뜨리고, 새로운 미래를 담보할 수 없게 만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원군이 닫았던 문은 결국 포연과 함께 깨졌다.
이제 범세계화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오늘, 우리가 다시 폐쇄적 민족주의로 해답을 적어낸다면, 몇 장의 개량한복과 김치 몇 포기는 더 팔 수 있을지 몰라도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은 헤어나기 힘든 함정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21세기의 열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다.
한번 탈락하면 다시는 올라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개방이 없으면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죽어버리고 만다.
영국이 영어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겨주고 만 이유 역시 거만한 우월의식과 폐쇄성 때문이었다.
이제는 문화적 공존을 위한 자세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
아니 이미 지났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폐쇄적 ‘민족적 아이덴티티’는 그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더욱 더 우리를 불행하게 할지 모른다.
오히려 열린 마음과 유연한 태도로 나의 문을 열고 타인의 문화와 공존할 수 있을 때, ‘우리 것’이 나름의 생존 공간을 얻게 될 것이다.
적절한 예가 될 수 있는 영어를 보자.
헌팅턴이 지적하듯이 이제 세계적 공용어가 된 영어를 더욱 광범위하게 받아들인다고 해서 정체성이 엉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한 문화권의 사고가 영어화, 서구화 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지적은 한국어를 외국어에 오염시키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많은 국수주의자들에게 적절한 어드바이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친구인 인도 국제대학 중문학과 교수 쿠마의 영어는, 뿌리는 라틴어였지만 영국 영어와도 다르고 미국 영어와도 다른 독특한 인도식 영어다.
어려서부터 힌두어와 함께 익힌 영어가 그의 인도적 정체성을 망가뜨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어는 국제사회에서의 언어적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국제어인 영어를 이용해 자신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알리고 자신들의 몸값을 높인다.
하지만 누구보다 한국적인 나는 그 잘난 영어 몇 마디를 못해 실력이 평가절하되기 일쑤다.
결국 외부의 언어인 영어를 국제어로 받아들이면 들일수록 문화적 정체성은 보호될 가능성과 기회가 훨씬 높은 것이다.
우리 문화에 대한 적극적 해체는 자기 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제대로 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3김의 DNA '거시기‘와 ’챠라‘
초등학교 수준의 역사 상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백제와 신라가 한반도 남부로 이주할 당시 한반도 남부에는 이른바 3한이 있었다.
바로 한강 이남의 마한, 그리고 변한, 낙동강 유역의 진한이다.
그런데, 소백산맥 동족에 있 던 변한과 진한은 남북을 관통해 흐르는 낙동강에 의해 하나의 지형구를 이루면서 통합되고 곧 신라에 흡수되었지만, 마한은 달랐다.
마한은 원래 한강 이남에 위치하고 있던 부족으로,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흔히 고조선 세력이 흩어지면서 내려온 것으로 해석하지만, 중국에서 발해나, 황해를 건너 한강을 따라 올라오다가 정착한 유민들일 가능성도 제시되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백제라는 이질 세력에 의해 남쪽으로 내몰린다.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백제와 마한의 두 세력은 말이 다소 달랐고, 주검을 다루는 묘지의 모습도 달랐다.
묘제란 원시적 생사관을 대변하는 것으로 문화의 갈래를 다룰 때 중요하게 채택되는 고고학적 증거물이지 않은가?
때문에 동일한 서해안 지역으로 보이는 충청도, 전라도의 내면에는 보다 재미있는 문화적 현상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즉, 크게 볼 때는 하나의 세력권이지만 내면에는 서로 다른 두개의 세력이 잠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정당들의 어색한 악수와도 같이, 그 속에는 바로 정복자 백제와 백제에게 밀려난 마한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에 의해 남쪽으로 밀려나던 마한은 정주영의 아성인 아산만과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거리인 천안을 잇는 일직선상에서 한동안 방어벽을 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백제는 다시 금강 유역을 점령하면서 마한을 영산강이라는 코너로 몰아넣는다.
바로 이 무렵, 왜는 언제나처럼 바다를 건너와 낙동강 하구를 중심으로 좌우, 즉 경상도, 전라도 일대를 휘저으며 가뜩이나 불편한 마한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었다.
때는 서기 369년이었다.
새로운 정복자인 백제는 느긋했다.
쫓겨난 마한 유민들은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해졌다.
동일한 서해안 일대의 충청권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느긋한 성격을 지니게 된 연유를 해석할 수 있는 최초의 단서일 것이다.
물론 비옥한 토지, 금강 등의 풍부한 물, 온화한 기후 역시 충청도 기질 형성에 한몫을 더 했을 것이다.
‘그려, 마음대로 햐아’는 바로 있는 자의 여유 내지는 거드름이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백제에게 근거지를 빼앗긴 마한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복자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까지 숙일 수야 없는 법, 그래서 찾아낸 화술이 바로 ‘거시기’ 아니었을까?
나의 마음을 알리기 싫은 상대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꺼낼 때 ‘거시기, 아니 거시기’ 만큼 좋은 암호도 없을 것이다.
결국 백제계의 충청에는 정복자의 느긋함이 서려있고, 마한계의 전라에는 고토 회복과 밀려난 자의 와신상담의 의지가 잠재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는 달랐다.
중앙 아시아의 스키타이계 문화를 배경으로 한 신라는 철제 병기를 들고 낙동강 지역으로 들어선다.
이들이 정확하게 어떤 경로로 이곳에 도착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시원한 답변은 없지만, 이들이 낙동강 유역의 수많은 철광
(밀양, 부산, 창원 등 주요 철광이 경주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울산 지역 철광은 노천 채광이 가능한 곳)과
거대한 숲을 목표로 내려 왔을 가능성은 무엇보다 높다.
특히 고분 속의 철제 도끼와 정들이 이러한 역사적 해석을 돕고 있다.
때문에 신라 문화는 기본적으로 대장장이 문화이다.
거친 채굴과 제련의 문화는 단발적인 동작과 소리를 낳게 마련이다.
‘헉헉’ 거리는 풀무와 ‘쿵쾅’거리는 망치 소리 속에서는 늘어지는 사설이나 창이 불가능한 법이다.
‘밥도오, 아아는, 자자’로 축약되는 우스개는 신라의 철기문화를 읽을 수 있는 흥미 있는 문화적 코드다.
빠른 결단과 강한 부정을 담은 ‘챠라!’ 역시 같은 맥락에서 풀 수 있는 표현이다.
말 장신구와 광산 도구 등을 만들 때, 벌겋게 달군 쇠를 찬물에 담그는 순간 발생하는 ‘촤아’ 소리만큼 강하고 열정적인 소리 말이다.
백제 계열의 해상 문화, 신라 계열의 철기 문화는 근본적인 출발이 다르다.
해풍을 예측해야 하고 돛을 만들고 키를 조절해야 하는 백제 문화와 철광석을 캐고 풀무질을 하고 마구를 두드려 만들고 말을 몰아야 하는 신라의 기질이 쉽게 화합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1937년, 일본은 한반도를 샅샅이 뒤졌고, 조선 내의 모든 미신 습속들을 조사한 후 ‘부락제’라는 보고서를 만들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에는 해양계 미신 습속과 대륙계 미신 습속이 있는데, 서해안 일대에 있는 해신당 등의 사당들은 모두 해양계 미신을 나타내는 장소로 다른 지역 등에는 없는 ‘물귀신’이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원시 종교의 갈등이 때로 구성원들의 충돌을 낳곤 하는 고대 사회의 현실을 상기해볼 때, 두 지역의 갈등은 역사와 농도가 꽤 깊은 편이 된다.
하바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지적하듯이,
종교 문화의 차이는 이데올로기적인 분할보다 더욱 근원적인 갈등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궁극적 충돌을 피할 수 없음이 사실이라면, 말귀신과 물괴신과의 화해는 애초부터 글러버린 일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신라계의 YS, 마한계의 DJ, 백제계의 JP가 보여주는 성격적 특성과 정치적 태도,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동네 사람들의 화해 역시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패러다임의 근원적 차이는 역사 속에서 지속된 정치적 배반들을 통해 점차 거친 모습으로 변모해가면서, 화해의 길은 점점 멀어져간다.
서기 538년.
백제는 공주와 부여를 저울질 한 끝에 산으로 둘러쌓인 협소한 공주보다는 호남평야의 경영에 더 유리한 부여를 수도로 삼는다.
새로운 출발을 한 백제는 과거 자기들의 땅이었던 한강 유역의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와 싸우며 일부의 땅을 회복한다.
그러나 이때 공짜 따을 노리고 있던 신라의 배반이 시작된다.
신라는 그 동안의 동맹관계를 깨고 조용히 백제의 뒤통수를 친다.
열을 받은 당시의 백제왕 성왕은 친히 원정길에 오르지만 신라의 복병에 의해 죽고 만다.
그 다음은 유명한 한국의 삼국시대다.
이 시기에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상황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백제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내린 묘한 처세적 해석이다.
백제 혜왕의 아들인 법왕은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모든 살생을 금하는 칙령을 내려, 민가에서 기르던 사냥매들까지 훨훨 날려버렸다.
물론 모든 사냥도구 역시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신라는 어떠했는가?
중국에서 불교를 배우고 돌아온 원광법사는 이른바 ‘세속5계’에서 ‘살생유택’, 즉 골라 죽일 수 있다는 살인면허를 부여한다.
더구나 신라의 김유신은 백제로 첩자를 보내 기밀을 입수하고 유력 인사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반면에 백제는 이상하리 만치 첩보전에 무관심했다.
이 때문에 007이 된 신라가 미륵불의 백제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더구나 신라는 당시의 역동적인 국제 관계의 변화에 적응하며 당나라를 끌어들이고 있던 시점이었다.
결국 백제는 3,000 궁녀를 끌어안고 백마강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시의 도시, 꿈의 도시’였던 백제의 멸망은 두고두고 이 지역의 한으로 남게 된다.
이 두 지역 문화의 갈등은 왕조가 바뀌었다고 간단히 봉합되지 않는다.
신라 골품제도를 통해 강화된 지역 차별은 북방 계통이 주류가 되어 이루어낸 고려를 지나면서 수면 아래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이러한 차별의 문화는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문화적 습성은 단순히 뇌에 의해 기억되는 것이 아니고 말과 음식과 놀이 속에 숨어서 오래도록 유전되는 것이기 때문에,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조선시대에도 백제와 신라의 근원적 갈등은 모습을 달리해 드러나게 마련이다.
조선 500년이 지나고 다시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하듯이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너무도 선명했던 사색 당파 싸움 때문에 백제와 신라 계열의 갈등이라고 분명히 드러나 보이지는 않으나, 그 내면에선 여전히 뿌리 깊은 지역 갈등이 지속되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개국 공신들을 중심으로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처음에는 서울과 경기 일대의 땅을 분배하다가 점차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땅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 역시 영호남의 지방 토착 세력들이 힘을 기를 수 있는 기반 역할을 했다.
양반신분을 가진 이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한정된 감투 자리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사색의 당파 싸움이다.
이들은 서로 쟁투를 벌이다 지게 되면 잠시 자신의 경제적 배경인 하삼도로 낙향했다가 기회를 잡으면 다시 서울로 들어오는 악순환을 계속했다.
물론 이 당시는 지금의 영호남 분열과 같이 감정의 골이 깊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인의 뒤에 이퇴계의 영남학파가 있었던 것처럼 나름의 작용을 했음이 사실이다.
또 훗날 왕의 외척이었던 안동 김씨들의 득세나, 정조 때 650개가 되던 서원들이 대원군에 의해 47개로 줄어들 때 당시의 대표적 서원이었던 충청도 청주의 만동묘 등이 사라짐과 동시에 충청도에는 5개, 전라도에 3개만이 남는 사건 등도 그저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경상도에는 모두 14개를 남겨, 인물이 밀집했던 경기도 지역의 12개보다도 많았던 상황을 단순한 학문적 성과로 풀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조금 길게 역사를 살펴본 이유는 지역 감정의 봉합은 단순한 정치적 이벤트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실 지역 감정이란 전 세계 문화권 어디에나 존재한다.
캐나다 사람들은 해외를 여행할 때 콩알만한 캐나다 국기를 붙이고 다니곤 한다.
이유는 단 하나.
‘미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또 한 때 독립을 위해 주민 투표까지 실시했던 퀘벡 시를 떠올려 봐도 캐나다 사람들의 정서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늘 서로의 험담을 하며 우스개를 즐기는 중국의 베이징과 상하이. 현재 주석인 짱저민과 총리인 사나이 주롱지는 모두 상하이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때문에, 그들을 상하이 빵(幇:중국 고대 사회의 이익 단체)으로 부르기도 한다.
타 지역과의 갈등 상황을 모를 리 없는 상하이 빵은 지역감정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특히 전통의 북방 세력 베이징 빵과의 협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최일선에 선 사나이가 ‘관을 100개 준비하라. 그 중 하나는 내 것이다.’라고 외치며 부패와 지역 이기주의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는 주롱지다.
그는 현재 주석인 짱저민보다 국민의 사랑을 더 받고 있다.
타이완의 경우는 훨씬 심각하다.
그들 사회는 원래 타이완 원주민으로 살던 사람들과 이주해온 대륙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결혼은 물론 서로 인사도 하지 않았던 그들은 말도 서로 달라 전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방송도 타이완 방언 방송과 표준어 방송이 있을 정도로 두 문화의 이질감은 심하다.
심지어 대륙계는 모두 물러가라. 우리 타이완은 독립을 하겠노라는 선언 때문에 중국이 미사일을 쏘고, 미국이 항공모함을 급파하는 등으로 동북아시아 전체를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몰고 간 적도 있으니 그들의 지역 감정은 가히 세계적 수준이다.
일본의 경우도 지역적 특성은 선명하기 이를 데 없다.
흔히 일본인은 모두가 꼼꼼하고 깍쟁이 기질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내면에는 역시 다른 점이 존재한다.
특히 잘 알려진 것처럼 도쿄와 나고야 사람들의 라이벌 의식은 나고야의 벌그스름한 된장국수와 도쿄의 맑은 된장국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나고야 사람들의 경우, 빠릿빠릿하고, 엄청나게 아끼고, 저축률 높고, 조금은 쌀쌀 맞은 깍쟁이 기질은 도쿄 사람과 비슷하지만, 뭔가 일이 있을땐 뻑적지근하게 쓸 줄도 아는 점은 도쿄와 또 다른 점이다.
특히 혼인을 성대하게 했던 문화 때문에 ‘딸 셋이 있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런 점은 잘 알려진 도쿄 사람들의 침착하면서도 꼼꼼한 기질이나, 허풍 떨기 좋아하는 큐슈 사람들과도 구별된다.
결국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도쿄 돔 마운드에서 강속구를 뿌리는 조성민과 그 강속구를 향해 배트를 휘두르는 쥬니치 이종범의 대결은 단순한 스타들의 몸값 싸움만은 아닌 것이다.
중국, 일본, 타이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들도 우리 못지않은 갈등의 과거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상태로 보면 일본과 타이완은 비교적 성공적인 모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과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점이다.
일본 같은 경우, 출신 지역 때문에 불이익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타이완 역시, 신분증이나 모든 서류 등에서 본적을 삭제하는 등 구체적 조치들로 지역 감정을 풀어나가고 있다.
남은 것은 중국과 한국인데 한국의 경우, ‘서동요’가 전하는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 공주와의 러브스토리를 상기해본다.
근대 한국의 정치적 갈등이 원인이라고들 하지만 영호남이 서로 미워하는 근원적 이유는 결국 서로에 대한 솔직함과 사랑이 없기 때문 아니겠는가?
인간이란 따지고 보면 참 웃기는 존재들이다.
양복을 입고, 핸드폰을 손에 들었지만 뇌는 여전히 청동기시대에서 멈추어 있다.
청동기, 철기시대부터 이어온 이 긴 애증의 역사와 함께 우리는 사이버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21세기로 들어가려 한다.
영남은 영남대로 ‘차랴!’만을 내뱉지 마라. 호남은 호남대로 너무 ‘거시기 하게’ 뭉치지 마라.
우리는 무엇으로 한국인인가?
문화란 흐르는 물이고, 향수와 같은 것, 알게 모르게 젖어 있어 자신은 모르지만 타인은 그 냄새를 잘 맡을 수 있다.
한국, 중국, 일본의 문화는 하나의 뿌리에서 성장한 서로 다른 가지에 불과하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인정할 때 올바른 우리를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것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서로의 동질성을 공감할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우리들이 힘차게 휘둘러대는 태극기의 태극이 종국 송나라의 주돈이라는 한 철학가의 머리에서 나온 단순한 철학 공식이며, 관련된 내용 전문이 249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당혹스러웠다.
또 중국인들이 태극기의 내력을 물을 때마다, 그것이 1882년 박영효라는 사람이 임오군란의 뒤처리를 위해 일본에 수신사로 가던 중 엉겁결에 배 안에서 만든 것이었노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 난처했다.
태극의 문양이 중국의 지방 도시 곳곳에서 태극권과 활법을 다스리는 도교주의자들의 깃발과 닮은꼴임을 확인할 때마다 황당한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다.
그후로 나는 태극기는 태극의 철학으로서가 아닌 수많은 선조들의 선혈로 이루어진 존재임을 떠올리려고 애쓰곤 한다.
우리가 즐겨 먹는 전통 음식 청국장이 사실은 청나라의 장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주로 동북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이 청국장은 때로는 날것으로 먹기도 하고, 때로는 명주실처럼 가는 흰줄이 쩍쩍 늘어붙는 청국장을 맹물에 풀어먹기도 한다.
일본인들 역시 이 청국장에 와사비와 양념을 섞어 날것으로 먹는데 , 작은 것을 좋아하는 그들인지라 콩알조차 자그만한 것들로 청국장을 만들어 먹는다.
‘일본사람들도 우리 전통 음식을 좋아한다’고 으쓱해 하다가는 머쓱해지기 십상이다.
또 민족의식의 고취를 위해 자주 동원되곤 하는 동학운동의 사상적 근원인 인내천(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뜻)이 지니고 있는 폐쇄적 민족주의도 결국은 천주교의 서학에 대항하고자 했던 반대 논리로 개발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리고 그것을 통해 7천만 민족의 대동단결을 이룩하겠다는 의지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더욱 답답해진다.
인내천이란 어떻게 보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통해 ‘민족’의 존엄과 단결을 이룩하겠다는 발상은 대단한 아이러니다.
백두산 천지를 두고 수많은 미사여구로 민족의 위대함을 노래하는 자아도취는 결국 시선을 백두산 천지에 모두 빼앗기고 만다는 측면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할 논조들이다.
산을 가다 보면 산이 있고, 산이 있다보니 폭포도 있고, 호수도 있음이 무에 그리 넋을 놓고 노래하며 민족 장래 모두를 부탁할 만큼 대단한 것이던가?
그것은 백두산 아랫마을 이도백하의 시장 언저리에서 더덕 몇 뿌리를 천년 묵은 약초라고 팔고 있는 허술한 장사꾼의 보따리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몸짓들이다.
지금 세계는 새로운 삶의 질서를 실험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대적 변환의 저변에 흐르는 새로운 질서를 우리는 꺼내보지 못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네오리버럴리즘)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흐름 속에는 개인적 삶의 자유와 창조적 공간, 맑은 환경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보기에 대단히 아름다워 보이는 이 질서 안에는 사실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 있다.
이제 모두 몸과 마음의 문을 열고 함께 삶을 이야기해보자는 이 질서 속에는 어느 한 지역 문화의 ‘성스러움’이나 ‘순수’가 그들만의 원시적 가치로 남아 있도록 놔두지는 않겠다는 ‘열어라’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제 그 흐름 앞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를 외치게 될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유교의 유효기간은 끝났다.
1910년 한일합방, 1950년 6.25, 1997년 IMF.
불과 100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세 번에 이르는 천지개벽을 불러들인 이 땅의 지식인들, 좀더 클로즈업해서 표현하면 유교 문화 속에서 성장해온, 그래서 알게 모르게 유교적 위선에 절어버린 엘리트들, 우리는 이들에게서 어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까?
그래도 여전히 이 시대를 예측하고 진단하고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오만한 그들이 제시하는 지도를 들고 우리는 다시 1,000년의 여행을 떠나야 하는가?
어지럽다.
어지럽지 않다면 당신은 이미 혼절해 있다. 아니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자는 이쯤해서 필자를 다양한 사회 현상을 유교라는 하나의 잣대로 매도하는 우를 저지르는 멍청이라고 쉽사리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cultural core', 번역하자면 ’문화의 핵심‘ 정도 되는 이 용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문화 현상의 기저에 저수지의 밑바닥처럼 검게 자리하고 있는 본질 비슷한 거 말이다.
사실 구차하게 이런 이야기를 주석으로 달지 않아도 우리 사회의 저변에 유교 문화의 특성이 두텁게 깔려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더러운 부유물처럼 떠 있는 목소리와 주장과 구호와 이념들 밑에 도사리고 있는 유교적 권위, 그리고 그것 앞에 엎드리는 타협,
그래서 만들어지는 불공평과 불투명함들. 그 본질들을 해체하고 찢어내고 씻어내지 않는다면 우리들 삶의 나무는 가지를 뻗지 못할 것이며 푸른 잎이 돋아나지 못할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끼나 버섯처럼 칙칙한 그늘 밑에서 잠시 돋아났다가 스러지고 말 것이다.
이제 알고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나야 그렇다 치고 내 자식들의 세대에까지 이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는 일이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이 거친 타이틀에 대해 나는 진지하게 답변하고 싶다.
나는 한국사회의 발전, 아니 한국이라는 문화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존권과 삶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인간적 권리가 질식되고 있는 이유를 유교에서 찾아냈다.
1995년에 있었던 한중일 3국 학자들의 동양 문명 진단 결과는 한국인들에게는 다소 충격이었다.
‘유교적 동양 문명이 향후 근대 세계의 보편적 사상이 될 수 있을 거서인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그렇다 90%
중국:그렇다 22%
일본:그렇다 63%
한국사회의 현상과 미래에 대해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우리들.
한국적인 것에 대한 막연한 싫증과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어느 길로 접어들어야 할지 몰라 세기의 사거리에서 망설이고 있는 우리들.
한번쯤 일찍이 돌아보았어야 할 과거가 우리에게는 있다.
과연 이제껏 해왔던 생활방식과 삶의 모습, 생각들을 그대로 유지한 채 새로운 1,000년을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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