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의 벨소리, 아이들이 386 세대라고 놀리는 바로 그 벨소리.......... 그리고 액정화면에 찍힌 번호 '011-621-6666' '홍기구나'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홍기다."
"이 18놈, 너 왜 안나왔어?"
"야 죤만아, 아무리 사형수라고 해도 이유나 듣고 죽이든 살리든 해라. 기봉이 새끼한테 전화했더니 다짜고짜 왜 안나왔냐고 욕부터 하더라."
"왜 안 나왔는데?"
"가게를 새로 오픈하는데 공사를 하느라 손이 달려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이해해달라고 기봉이한테 전화를 해 놨는디, 그 새끼는 그런 말은 쏙 빼고 안나왔다고 지랄이다. 지랄이여"
"조또, 변명 한번 그럴싸하다."
"참말이라니까, 친구들은 많이 왔디? 재미있게 놀았냐?"
"60여명 왔으니까 많이 온 것인지 적게 온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만나니까 삥아리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고, 헤어질 때는 진짜 서운하더라."
"에이, 꼭 갔어야 했는디 서운허다. 다음에는 또 언제 헌다냐?"
"1년에 한번씩 열기로 했단다."
"재미있는 일은 없었냐?"
"띠발 놈아, 그 것 다 갈쳐주면 참석 한 놈이나 참석 안 한 놈이나 똑 같으라고?"
* * * *
"국민학교 동창회? 글쎄...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기봉이가 꼭 동창회에 참석하라고 말했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하기는 무안할 것 같아 그렇게만 말하고는 속으로는 월드컵 4강 기념으로 임시 공휴일이 된 7월 1일까지 연휴를 편안하게 즐기리라고 생각하였다.
2002. 6. 30. 11:00 옥과 초등학교 체육관. 승채 손에 끌려가다시피 참석한 자리에는 친구들이 모여 있다가 나처럼 늦게 오는 사람들을 반겨 주어 고마웠으나 생소한 얼굴이 내미는 악수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특히 아줌마가 된 아줌마들에게는 더.....

옛날부터 엘비스 플레슬리를 숭상하던 사회자 전기봉의 주도로 '발묶고달리기' 시합을 하는 동안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친구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선전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응원을 시작한다. "워~매", "어머머...."하는 안타까운 탄식도,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도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땀에 흠뻑 젖어 헐떡이는 선수에게 시원한 맥주나 물을 권커니 작커니 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어느새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이 베어나고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앞서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농사꾼 행색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모두 친구일 뿐이었다. 아무런 조건도 없는 단지 친구일 뿐이었다. 그들이 토해내는 웃음에는 가식이 전혀 없었다. 잠시 친구들 얼굴만 보고 가겠다는 어떤 친구는 어둠이 들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글썽거렸다. 33년의 세월이 너무 억울하다고.....
행사를 마무리하는 음악이 나오자 친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앙 무대로 모여 양손을 잡고 우측으로 돌다가, 좌측으로 돌다가, 가운데로 손을 들어 모였다가 손을 내려 원을 만들고....... 헤어지기로 했으면서 서로 눈치만 볼 뿐, 체육관 문 앞에서 헤어질 생각 없이 서성대고 있다가 술 좋아하는 친구들은 따로 모여 옛 일을 회상하며 우정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 찾아드는 공허, 33년을 훌쩍 뛰어 넘은 공백 속에 겨우 채워진 것은 내 아이들이 이렇게 컸노라고... 나를 닮은 아이가 지금 대학생이라고..... 자랑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코끝이 '찡' 울리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은.......
어른이 되어도 우리 우정 결코 변치 말자는 언약을 새삼 떠올리며.... 며칠을 그렇게 가슴 아프게 보냈다.
* * * *
내년에는 더 많은 친구들이 모이겠지
또 아이들을 앞세워 우리들이 뛰어넘은 세월을 채우며 노래하고 헛웃음 치겠지
의사도, 대학교수도, 공무원도, 사업가도, 농사꾼도, 그 아내들도......... 헤어짐을 아쉬워 하며 양손을 잡고 우측으로 돌다가, 좌측으로 돌다가, 가운데로 손을 들어 모였다가 손을 내려 원을 만들고....... 헤어지기로 했으면서 서로 눈치만 볼 뿐, 체육관 문 앞에서 헤어질 생각 없이 서성대고 있겠지
34년의 세월이 당연한 듯 감수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