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호 |
제 목 |
이 름 |
조 회 |
등록일자 |
| 97 |
아부지의 지갑(퍼온글) |
전기봉 |
2055 |
03-10-25 0 |
| 내 용 |
아버지의 지갑 - 백 동 원
인간의 지갑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그야 물론 신분증이나 운전면허증, 그리고 지폐나 신용카드가 들어있을 것이다. 그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갑 속에 인간 생래(生來)의 비애도 한 움큼 들어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리라.
IMF로 인해 멀쩡한 가장들이 노숙자가 되어 지하도나 공원의 벤치로 내몰리던 그 해 겨울. 방송 카메라가 훑고 지나가는 삭막한 공원의 한 귀퉁이에 그 중년남자도 있었다. 몇 달 전까지 만해도 조그마한 기업체를 운영했다는 그 남자는 빚에 쫓겨 아내와 이혼하고, 그 곳에 나온 지 달포쯤 되었다고 했다. 방송기자와 인터뷰하고 있는 그 순간, 공교롭게도 친척집에 더부살이 하고 있다는 여중생 딸이 그곳까지 그를 찾아왔다. 교복을 차려입은 딸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화면에 나오고 있었는데, 딸에게 용돈을 주려고 지갑을 꺼내는 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갑 속에 들어있는 돈은 단돈 삼 만원. 그걸 모두 꺼내어 딸의 손에 쥐어주고서 힘없이 돌아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의 등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덩달아 화면도 떨렸다. 아마 텅 빈 그의 지갑 속에 숨어있는 한 움큼의 슬픔을 목격하고서 카메라맨도 한 방울 눈물을 흘렸으리라.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 해의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방과후에 한 부잣집 급우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았다. 초대받은 친구들끼리 얼마간의 돈을 갹출(醵出)하여 그 급우의 생일선물을 사기로 약조를 하였는데, 학교가 파한 후 돈을 타러 집에 들른 나는 난감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돈을 타기에 말랑말랑(?)한 어머니께서는 출타하고 안 계셨고, 대신 엄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께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셨기 때문이다. 평소에 거의 낮잠을 주무시지 않는 아버지께서 그 날은 몸이 안 좋으셨던지 깊이 잠들어 계셨다. 나는 아버지를 깨울 엄두를 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난생 처음으로 아버지의 지갑을 털기로(?) 결심을 하였다.
도둑고양이처럼 발끝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아버지의 상의에서 몰래 지갑을 꺼내어 들여다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갑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릿한 슬픔이 전류처럼 나를 관통하였다. 어린 마음에도 '아, 나와 우리 형제들을 가르치시느라 아버지의 지갑이 이렇게 텅 비어 있구나!'하는 자책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도리어 아버지의 지갑을 돈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후 10년이 지난 어느 추운 겨울날, 지갑을 가득 채워드리고 싶다는 나의 소원을 뒤로하고 아버지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소원은 이룰 수 없는 소원이 되고 말았다.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님의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나는 다시 아버님께서 남기고 가신 빈 지갑을 발견하고서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을 느꼈다. 또 속절없이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몇 해전 꽃들이 만발한 어느 화창한 봄날에 고향 선산발치에 모신 아버님의 묘소를 이장하게 되었다. 가족들과 함께 모여서 파묘(破墓)를 한 후, 따뜻한 봄햇볕 아래서 아버님의 유골을 수습하던 나는 그만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그때 나의 수중에는 아버님의 지갑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 있었지만, 정작 넣어드릴 아버님의 지갑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허무감에 사로잡혔다. 수의(壽衣)에는 호주머니가 없다지만, 그 수의마저도 삭아서 형체를 찾을 수 없었으니......
내가 습골(拾骨)작업을 하다말고 가족 몰래 오랫동안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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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일자 : 2004-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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