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제 목 이 름 조회수 입력일시 15 600년 전 편지를 만나다. 이광재 904 2005-09-14 내 용 600년 전 편지를 만나다. ------------------------------ 국내 최대 편지박물관 옥과미술관 ▲ 글을 쓰다가 종이가 부족하면 여백 있는 곳을 찾아 이어 쓰는 '태극도법'으로 쓴 간찰. 오래된 편지들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주고받은 이야기들이다. 짧게는 100년, 길게는 600년을 묵은 것들이 한두 점도 아니고 수천 점이다. 곡성군 도립옥과미술관. 아산(啞山) 조방원 화백(82)이 수집해 기증한 간찰(簡札) 5770점이 보관돼 있다. 간찰은 옛날 사람들이 간지에 써서 주고받은 것으로 오늘날 편지라고 보면 된다. 이곳 간찰들은 한 곳에 모은 규모로는 전국 최대를 자랑한다. 두번 째 많은 곳이 성균관대학으로 3000여 점이라니 그 규모가 놀랍다. 그래서 이곳은 미술관인 동시에 박물관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조방원 화백이 수집·기증한 간찰 5700여 점 ----------------------------------------- 미술관 소장고에서 간찰집을 꺼내본다. 세월만큼 누렇게 빛바랜 간찰들이 접이식 책자에 한 장씩 붙어 있다. 옥과미술관 최준호(48) 관장에 따르면 이 편지들의 주인공은 대부분 공직자들이란다. 오늘날 우체국장에 해당하는 찰방에서 영의정까지. 추사 김정희의 글도 보인다. 반듯한 해서체는 드물고 휘갈겨 쓴 행초서(行草書)가 대부분이다. 최 관장은 “글 쓰는 격식은 상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특히 간찰에 씌인 글씨체는 보통의 행서나 초서와도 또 다른 독특한 필법들을 보이고 있다. ‘간찰체’라고 따로 분류해 연구해볼 만하다”고 설명한다. 글 쓰는 방식도 재밌다. 이건(1614∼1662)의 간찰이 눈길을 끈다. 문장을 따라가노라면 종이를 빙글빙글 돌려야 글의 끝에 닿을 수 있다. 글을 쓰다가 종이가 부족하면 여백 있는 곳을 찾아 이어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그렇게 됐단다. 이른바 ‘태극도법(太極圖法)’식 글쓰기는 한 장짜리가 대부분인 다른 간찰들에서도 흔한 모습이었다. 종이가 귀한 시대였다지만, 그 알뜰하게 아껴 쓰는 마음은 오늘도 배울 만하다. 어떤 편지바탕에는 꽃그림이 그려져 있다. ‘꽃 편지지’의 원조를 만난다. 선물 감사, 인사 청탁, 병납 고민 등 과거 생활사 단면 더듬더듬 한자를 읽어 보지만, 금세 밑천이 바닥난다. 글씨를 못 알아보겠다는 핑계로 미술관이 펴낸 간찰목록집에 손이 간다. 각 편지마다 고유번호를 매기고 발신자와 수신자, 그리고 개략한 내용과 연도 등을 기록해 놓았다. 하지만 빠진 게 많다. 더욱이 간찰을 소개한 내용이라곤 한두 줄짜리 개요가 전부다. 그래도 무슨 내용인가 가늠 정도는 해볼 수 있어 누군가의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친인척간에 오간 편지가 많은데, 효도나 면학을 강조하거나 안부와 개인적 부탁들이 보인다. 특히 선물에 딸려 보낸 편지가 많다. 부채나 벼루, 붓, 청죽, 그리고 간지(間紙) 외에도 참빗선물이 많은 점이 이채롭다. 땔나무용 소나무 가지나 말(馬), 진흙신발과 주립(붉은 칠을 한 갓), 그리고 탕건도 우송을 부탁한 물품들 가운데 하나다. 고위직의 친척에게는 ‘비늘이 아름다운 물고기’나 생(生)자라, 꿩, 심지어 학을 선물한 경우도 있다. 사정이 어려우면 친지에게 손을 벌린다. 그러다가 돈 문제로 친척끼리 갈등이 생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 가운데 친지에게 소작료 완납을 독촉하는 서한(유물번호840)에선 말만 친척이지 ‘놀부’가 따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친지에게 장수(長壽) 방법을 알려준 서한(680)이나, 전염병의 피해를 우려해 안부를 묻는 서한(1362), 그리고 조카의 병에 대한 치료방법을 논의한 편지(3145)들에선 정이 묻어난다. 물건을 보내면서 인사나 송사 관계를 부탁하는 사연도 있다. 요즘말로 뇌물청탁인 셈이다. 친지에게 진급관계를 부탁(428)하면서 인사를 덧붙이거나, 진도군수로 부임한 친지에게 관내 특정인에 대한 특별한 보살핌을 당부한 사연(144)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뇌물공세가 늘 성공한 것은 아닌 듯. 이용현이라는 사람이 이생원에게 보낸 편지(1128)에는 친지로부터 소송문건에 대한 부탁을 받고 이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 내용이 들어 있다. 오늘날 부정입학의 뿌리도 발견할 수 있는데, 송모라는 사람의 편지(4351)는 자신이 재임중인 학교에 친지가 부당한 입학을 부탁하자 이를 거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병납(兵納) 관계로 고심중인 친지에게 보낸 위로 서한(656)을 보면 군대관련 문제는 과거에도 고민거리였나 보다. 이밖에 병인양요나 당쟁, 동학 등 격동기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글이나, 문고의 교정 및 간행관계를 상의하는 학술적인 내용의 글, 그리고 감흥을 표현한 시구도 있다. 종이와 글씨 변화 고스란히 담겨 ------------------------------ 최준호 관장은 이곳 간찰들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약 500년에 걸쳐 모인 자료들이다 보니 종이와 글씨의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개인적인 글이 주는 생활사의 생생함은 물론이고, 정사(正史)에서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이기에 역사를 살찌우는 좋은 사료가 될 수 있죠.” 하지만 이들은 그저 ‘모아져’있을 뿐, 아직 가치만큼의 빛을 보지는 못하고 있다. 미술관측은 지난 97년 간찰목록집을 펴낸 뒤 이제까지 탈초작업(반듯한 한자로 옮겨 쓰는 일)을 겨우 마친 정도다. 방대한 분량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문적 인력과 비용 때문에 번역작업에 손을 못 대고 있다는 것. 최 관장은 “문화유산은 보존도 중요하지만 창달도 돼야 한다”면서 “지금도 어느 집 다락 구석에 처박혀 있을 이런 간찰들이 많을 텐데, 이들이 언제 도배지나 휴지로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는 이곳을 간찰박물관으로 특성화시킴으로써 개인 소장 중인 간찰들을 모으고, 동시에 국책사업을 통한 번역작업을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나절 외출을 마친 간찰들은 다시 보자기에 싸여 수장고 진열대로 올라갔다. 한 시대를 살았던 개인 간의 내밀한 이야기들. 오랜 세월이 지나다 보니 그 자체로 역사가 됐다. 하지만 그 역사는 아직까지 보자기에 싸인 채 비밀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